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요즘 시집은 어렵다. 눈으로는 읽어도 머리로는 당최 읽혀지지 않는 것이다. (나만 그런가?) 도서관에 갈 때 마다 시집 한 권씩은 빌려와 읽으려고 하는 편인데 제대로(라는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읽은 작품은 손에 꼽히는 것 같다. 이대로는 시에 대한 흥미가 떨어질 것 같아 오랜만에 국어국문학과 동기에게 추천해줄만한 시인이 없는지 요청했는데 반가운 도종환 시인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사적인 공간'의 첫 게시물 또한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지 않겠는가! 곧바로 도서관으로 달려가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를 빌려와 읽었는데 '그래, 이거지!'싶은 생각이 절로 들면서 오랜만에 눈과 머리, 모두 잘 돌아갔다는 후문. 특히 시 '연두'에서 '연두는 초록의 어린 새끼'라는 신박한 표현이 크게 파도치는 물결처럼 도망칠 겨를 없이 내 마음을 흠뻑 적셨는데 그 때 시인은 시인이구나, 느꼈다. (나도 내 인생에서의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를 지나갈 때면 조금이라 닮고 싶다는 욕심이 든다.)
국어국문학과를 나왔다는 사실에 눈치챘겠지만 나는 시를 좋아하고 또 써보고 싶어 노력하는 편이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불현듯 지금 이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에 뭐라도 써내려갈 때가 많은데 마음만 앞섰지 시간이 흘러 다시 읽어보는 습작노트의 글들은 엉성하기 짝이 없다. 내 마음은 이게 아닌데. 요즘처럼 꽃눈깨비가 내리는 시기에 떨어진 벚꽃잎을 보고 짓궂은 바람의 장난에도, 무심한 이들이 밟고 지나가도 벚꽃잎은 여전히 아름다운 벚꽃잎이라는 마음을 담은 시를 쓰고 싶었다. 그럴 듯한 표현이 없을까, 골똘하게 고민하다가 결국 식상하게도 아름답다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는데 시 '라일락꽃'에서 도종환 시인은 '향기는 젖지 않는다,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라고 노래하고 있어 이전에 내가 쓰고 싶었던 시가 맞물리면서 더욱 대단하다고 느껴진 부분이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꺼내 본 습작노트는 여전히 내 알몸처럼 보여주기 부끄러웠다.)
시 '발치'에서도 이를 빼고 치과를 나선 화자가 '초가을에서 깊은 가을로 돌아가는 길'에 '옹송그리며 서 있는 과꽃 몇송이'를 보고 '이파리 몇개는 벌레 먹고 군데군데 구멍이 났는데도 자줏빛 꽃 곱게 피우고 있는 게 예쁘다'고 했다. 진종일 비에 젖은 꽃도, 이파리 몇개는 벌레 먹고 군데군데 구멍이 난 과꽃도, 지금 흩날리는 벚꽃잎도 결국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우리와 마주치면 '어!'하고 핸드폰 카메라를 켜게 할만큼 아름다운 존재인 것이다. 비단 식물뿐만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연스레 접히는 눈가도 하얗게 물들어가는 머리카락도 그 사람의 본질을 바꿔놓지는 못한다. 당연한 세월의 흐름이며 그 자체로도 아름다우니 변화에 너무 민감해하지 말도록 하자. 당신은 여전히 아름다운 당신 그대로로 남아있다.
- 저자
- 도종환
- 출판
- 창비
- 출판일
- 2011.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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