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다방/산딸기] 소문은 그 많은 뱀딸기를 먹지 못하게 했다
김승강 시집 <흑백다방>, p.34, <산딸기>를 읽고
흑백다방이라는 책의 제목은 정겨운 옛 추억을 소환하는 따스한 느낌이었지만
이 시집에 실린 시를 하나, 둘 읽으면서 상반되게도 굉장히 불쾌함을 느끼고 말았다.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에 도중에 그만 읽을까도 여러 번 고민했지만
이왕 읽기 시작한 시집이니 끝까지 읽자, 라는 이상한 오기에 끝까지 읽어냈다.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나의 불쾌함이 비롯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기에 모두 언급할 수 없으니
가장 어이없었던 구절을 하나 보여주자면 아래와 같다.
'나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꽃을 탐했다.
어떤 꽃은 쉽게 꽃잎을 열어주었지만
어떤 꽃잎은 너무나 단단해
내 뜨거운 입맞춤으로도 열지 못했다.'
이밖에도 성적인 묘사가 없는 시를 꼽기가 어려웠으며 성관계를 암시하는 시들 조차 아름답지 못했다.
아내는 자신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자신의 속에 다른 여자가 있음을 안다는 둥, 길고양이에게 돌을 던지는 둥.
나는 이 시집의 시들을 읽어가며 다시는 이 시인의 시집을 읽지 않겠다고 여러 번 다짐했다.
그럼에도 사적인 공간에 독후감을 남기고 싶은 소재의 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산딸기>.
이 시에도 어김없이 뱀딸기를 가시내의 붉은 젖꼭지에 비유하여 읽기 거북했지만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소문의 무서움'은 누구나 몸서리치면서 겪어보지 않았을까?
산딸기를 먹으며 우연히 나온 뱀에 대한 이야기, 누군가 산딸기 밭에는 뱀이 많다고 말을 한다.
그런 말에 의심이라도 한 번 할 법 한데 오히려 산딸기 밭에서 사라지는 뱀의 꼬리를 본 것 같다니.
거기에 더해 뱀 이야기가 나오니 뱀딸기라는 이름까지 생각해내 소문을 거의 사실화시켜버린 셈이다.
(뱀딸기는 마치 뱀처럼 땅을 기면서 자라나는 줄기 덕분에 이런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런 소문을 사실로 믿어버리니 뱀딸기는 뱀의 몫, 산딸기는 우리 몫.
딱 선을 그어버리면서 안도와 함께 속에서는 보지도 못한 뱀의 똬리 튼 모습을 상상하며 몸서리치는 것이다.
그 많은 뱀딸기를 누군가의 말 한 마디에 손도 대지 않은 채 있는지도 모르는 뱀에게 양보해버렸다.
하지만 뱀딸기는 산딸기에 비하면 그 맛이 맹맹하여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것이 특징.
아무래도 소문의 진상을 파헤쳐보면 별 볼일 없다는 걸 말하고자 한 게 아닐까?
대부분의 소문은 부풀리고 또 부풀려져 거대해져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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